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닛타 요시사다 (문단 편집) === 평가 ===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맞수'''로 불리기는 하지만 사실 무장으로써의 능력이 과연 아시카가 다카우지나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 당대의 무장들에 비하면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학자들의 해석에 따라서 논란이 있다. 동시대에 남조를 주도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아버지.]가 쓴 《신황정통기》에서는 “고즈케 국에 미나모토노 요시사다라는 자가 있다. 고 가문(高氏)[*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였던 고 모로나오와 같은 집안이다. 덴무 천황의 먼 후손으로 알려진 다카시나(高階) 씨의 일족이라고.] 일가이다.”라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보다 격하시켜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 같은 기사는 《마스카가미(增鏡)》에도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닛타 가문의 조상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의 첫째 아들 닛타 요시시게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막부]] 창설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막부 성립후 미나모토노 요시쿠니 계통을 묶어 이들 가문을 이끌 기둥은 닛타 요시시게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야스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네로 보았고, 닛타 가문 뿐만 아니라 겐지(源氏) 계보를 가진 무사들에게도 관행처럼 정착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 닛타 일가 중에서도 아시카가 가문을 무가의 도료(당주)로 인식한 자도 있었고, 야마나 가문 등은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했을 때, 아시카가 센주오(후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지휘권 안에 편입해 아시카가 측에 조력하였다. 또, 무로마치 시대에 집필된 군기물 《태평기》에서는 문무와 지략을 겸비한 무장으로 그려지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비해 요시사다는 작자의 공감대를 사지 못해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싸움에서 패한 우유부단한 무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일례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셋쓰 도요시마가와라에서 닛타 요시사다에 패해 규슈로 도주했을 때 고토노 나이시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여 추격에 소홀했고, 그 틈에 다카우지는 세를 수습해 다시 거병해 미나토가와 강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군을 격파하고 교토에 개선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매송론》에서는 하코네 전투에 패한 닛타 군의 병사가 덴류 강의 다리를 끊으려 할 때, 요시사다는 “다리를 끊더라도 다시 놓으면 된다. 닛타 군이 다리를 끊고 허둥대며 도주한다면 이는 후대까지 수치로 남는다.”며 현지 주민에게 다리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고 병력을 이끌었다. 그 후 추격해온 아시카가 군 장병이 그 발언을 듣고 “무가에 태어난 자는 누구라도 요시사다와 같이 행동했을 것이다.”라고 상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 전쟁 전까지 황국사관 아래에서 〈역적〉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비해 고다이고 천황을 따른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뒤를 잇는 영웅으로 평가되어 강담 등에의 소재로 이야기되었지만, 종전 후 일개 간토의 무장에 불과한 자가 능력 이상의 대임을 맡은 평범한 무장으로 보기 시작했고, 전략가로서도 평범하고 우둔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는 《태평기》의 묘사만의 평가로 그다지 신빙성이 낮고, 다카우지와의 인망의 차이도 가문의 격에서 온 것일 뿐, 단기간에 가마쿠라를 함락시킨 점과, 압도적 실력차가 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잠시 동안이나마 격파했던 점 등을 거론하여 무장의 자질을 평가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다. 또, 군마의 지역 가루타인 조모 가루타에서 닛타 요시사다가 등장해 지역민에게는 친숙한 무장이다. 닛타 요시사다가 등장하는 부분은 이로하 중 레(れ)부분이며 “역사(레키시)에 명망높은 닛타 요시사다”로 쓰여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